[특별 인터뷰] 현정화 | 탁구감독의 2박3일 방북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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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72회 작성일 21.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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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현정화 | 탁구감독의 2박3일 방북 스토리
“북한 여자들이 화장을 시작했다”
글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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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란관 만찬장서 김정숙 여사 ‘동무생각’ 열창, 옥류관 냉면은 ‘밍밍해’…백두산 정상에서 천지까지 케이블카로 7분, 이분희와 재회 불발 아쉬워

▎현정화 한국마사회 감독은 남북평화 정착을 위해 탁구로써 돕고 싶은 마음을 피력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1991년 세계 정상을 함께 밟은 북한의 이분희와 만날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9월 14일이었다. 현정화(49) 한국마사회 탁구단 감독 휴대전화에 모르는 번호가 떴다. 받았더니 “대통령 비서실입니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때만 해도 평양 남북 정상회담은 먼 얘기인 줄만 알았다. 응답을 하기 전 “왜 나냐?”고 물었다. 비서관은 “충분히 가실 만합니다”고 답했다. 회사에 다음날 보고를 해서, 동의를 받았다. 그렇게 18일부터 2박3일간 현 감독은 북한을 관찰하고, 체험했다. 경기도 구리에서 만난 현 감독은 아직 여행자의 상기된 얼굴로 비쳤다.

“13년 전보다 거리에 사람 많아”


▎평양 창전거리를 거닐고 있는 북한 여성들. 배경을 서울로 바꿔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옷차림이 세련돼 보인다.
과거에도 북한에 갔던 적이 있었지 않나?

“2005년 6월(6·15민족통일대축전 민간대표단 자격) 버스로 600명이 (육로로 북한에) 갔다. 그때 평양을 제법 많이 봤다. 이번에 가보니 13년 전에 비해 평양은 업그레이드된 느낌이었다. 건물이 많이 바뀌었다. 그때도 5·1경기장에서 집단체조를 봤는데 지금은 드론도 띄웠다. 컴퓨터 그래픽과 연결돼 공연을 했다. 예술문화 공연할 때 조명도 훨씬 좋아졌다.”

거리 풍경은 어땠나?

“길거리를 왔다갔다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얼굴에 빛이 돌았다. 그땐 전기 공급이 어렵다고 했는데 발전한 느낌이었다. 건물은 색감이 있고, 사람들의 차림새는 세련돼졌다. 여자들은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예전엔 호텔 종업원 정도가 했는데 지금은 다 화장을 했다. 이들이 쓰는 화장품이 (어느 나라 제품인지 몰라도) 고급이라고 느꼈다. 길거리에서 청량음료를 팔았다. 우리로 치면 커피점 같은 곳인 듯했다. 북한 과자도 제법 많아졌다. 그땐 없었는데…. ‘오미자 단물’을 마셔봤는데 말 그대로 단물이었다. 오미자 향이 조금 났다.(웃음)”

방북 준비 교육은 어떻게 받았나?

“화요일(18일) 출발이었다. 월요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교육을 받았다. 숙지해야 될 것들을 얘기해 줬다. 특히 언어를 쓸 때 조심할 것들이 있었다, ‘남측’ ‘북측’이라고 말하라고 권했고, (김일성·김정일이 새겨진) 배지 얘기는 하지 말라고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수행원들 대부분이 왔다. 가수 알리하고 마술사 최현우는 안 왔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추가로) 발표됐고, 데리고 갔다. 최현우는 그날(18일) 새벽에 전화가 왔다고 했다. 듣기론 김정은 위원장이 마술을 좋아한다더라. 최현우는 공연할 때 두 정상 앞에서 했다. 우린 멀어서 어떤 공연을 했는지도 몰랐다. 남에서 200명, 북에서 100명, 총 300명이 앉아 있었으니까 멀었다. 마이크도 없이 공연했다. 최현우가 (청중의) 시선을 뺏어야 했는데 (조용히 마술만 하느라) 너무 어려웠다고 하더라. 나중에 들었는데 카드 마술을 했다.”

휴대전화는 가져가지 못했다. 사진촬영을 많이 했나?

“다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는데 못해서 아쉽다. 디지털카메라가 없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는 못해도 가지곤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성남공항에서 ‘안 된다’고 하더라. 최태원 SK 회장님이 디지털카메라로 되게 많이 찍고, 찍어주셨다. 같이 다니니까. 어차피 그분도 수행원 없이 직접 다니니…. 거의 많이 같이 휩쓸려 다니다 보니 최태원, 이재용, 구광모 회장이 찍고, 찍어주고 그랬다. 북한은 (사진 촬영을) 전혀 제지 안 했다.”

“고려호텔에서 한국 방송 틀어줬다”


▎김정숙 여사는 옥류아동병원 방문으로 방북 일정을 시작했다. 북한 이설주 여사(김 여사 뒤)는 그런 김 여사를 세심하게 예우했다. / 사진:연합뉴스
북한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을 땐 특별한 일은 없었나?

“성남공항에서 공군 1호기로 갔다. 딱 1시간 걸렸다. 새벽에 일찍 나와서 너무 피곤했다. 잠깐 졸았다 일어나니까 거의 도착이었다. 평양 순안공항에 내린 다음, 버스로 갔다. 꼭 제주도 가는 느낌이었다. ‘유명인들과 같이 가는’ 느낌이 특별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북한은 어땠는가?

“우리 시골 같은 느낌이 첫인상이었다. 순안공항은 한적했다. 내려서 버스에 바로 탔다. 예술문화공연단은 14호차였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내려서 정상끼리 만나고 있었다. 눈앞에서 보니 무척 신기했다. 역사의 현장을 보니까 뭉클하더라. 군데군데서 울컥해 했다. 버스를 타고 공항을 나와 2~3분쯤 갔는데 그때부터 평양시민들이 양쪽으로 나눠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자립!’ ‘자주!’ ‘번영!’ ‘통일!’ 이런 단어를 외치며 박수를 계속 쳤다. 감동적이었다. 쭉 가서 없어졌다가 평양 시내에서 다시 또 나타나 계속 이어졌다. 차범근 감독님이 ‘눈물 난다’고 하셨다. 너무 많은 사람이 나와서 놀랐다. 더 놀란 것은 (20일) 백두산에 갈 때였다. 새벽 5시에 나와서 컴컴했다. 피곤해 눈을 감고 가는데 갑자기 소리가 들렸다. 그 새벽에 평양시민들이, 어두워 잘 안 보이는데도 손을 흔들고 있었다.”

19일, 5·1경기장엔 15만 명의 북한 주민이 동원됐다.

“경기장에 들어설 때, 대형 한반도기가 올라갈 때 움찔했다. ‘통일’과 ‘하나’를 테마로 집단체조를 만들었다. 문 대통령께서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한다. 한반도에 앞으로 평화가 올 것이다’고 연설할 때는 감동이었다. 15만 명이 기립박수를 쳤다. 이번 만남 전까지 (두 정상 간의)회동이 두 번 있어서였는지, 옥류관 첫 식사 때부터 사이가 좋아 보이더라. 이설주 여사는 우리 김정숙 여사를 잘 모시려 하는 느낌이었다. 서로 기분이 좋았으니 식사만 하면 2시간씩 하지 않았겠나?”

14호차 버스 안 분위기는 어땠나?

“유홍준 교수님이 연장자였는데 주도했다. 너무 재밌으시다. 역사를 다 꿰고 계시고, 특급 가이드였다. 이분이 부채를 늘 가지고 다닌다. 거기다 직접 그때마다 생각나는 그림을 그리고 글 써서 나눠 주신다. 교수님은 이 버스 안에 세대 차가 나 오히려 좋다고 했다. 차범근 감독님도 좋았고, 안도현 시인은 차분했다. 글 써야 된다고, 열심히 적고 다니시더라.”

숙소는 고려호텔을 썼다.

“13년 전에도 가봤다. 그때와 거의 비슷했다. 오래돼서 신식은 아니다. 우리나라 관광호텔 같은 시설이다. 욕실은 ‘toto’ 일본 제품이 있어서 신기했다. 북한제 샴푸·린스도 있었다. 한국에서 가져간 것이 있어 쓰진 않았다. 평양 여명거리는 왔다갔다할 때 보기만 했다. 새로 지은 신도시라고 하더라. 우리가 탄 차에는 두 명의 북한 여자 수행원이 붙었다. 그 친구들이 다 설명해 줬다. 호텔 TV에서 한국 방송이 나왔다. 원래 안 나오는데 특별히 나오게 해줬다고 했다. 본 사람도 있다던데 내 방은 안 나오더라. 북한 방송은 안 봤다. 11시 넘어 들어가서 자고 또 11시에 들어가서 다음 날 새벽 3시에 일어나니까 볼 시간이 없었다.”

평양에 들어간 후 김정숙 여사와 가장 먼저 간 곳이 옥류아동병원이었다.

“아동병원 중 북한에서 제일 좋은 곳이라 들었다. 이설주 여사를 거기서 처음 보았다. ‘한국에 비해 시설이 낙후됐다’고 이설주가 설명했다. 이설주의 첫인상은 참하고 고왔다. 우리 오기 전에 이설주가 30분 먼저 와서 기다렸다고 한다. 차가 막힐 일이 없었다. ‘왜 차가 없지’ 했는데 다 통제했다. 평양 도로는 나쁘지 않았다. 버스가 다니고 대중교통이 잘돼 있더라. 제법 차도 많았다.”

김정은 위원장 “간나새끼” 농담


▎현 감독이 가져온 평양대극장 공연 레퍼토리. 18일 목란관 만찬과 19일 옥류관 오찬 코스 메뉴까지 살뜰히 챙겼다.
그 다음에 김원균음악종합대학에 갔는데 어떤 일이 있었나?

“대학생들이 가야금 연주하는 것을 보고, 1시간 공연을 봤다. 그리고 평양 대극장에서 공연을 봤다. 우리를 배려해선지 한국 노래가 많았다. 정치색이 들어간 노래는 전부 뺐다. 북한 관중도 많았다. 오케스트라 공연도 따로 했다. 이 공연이 2시간 정도 끝나고 식사를 했다. 10시에 순안공항에 도착해 고려호텔에 가니 오전 11시였다. 로비에서 절차가 오래 걸려 12시 넘어서야 방에 들어갔다. 원래 좀 쉬다가 3시에 나가기로 했는데 1시40분에 나오라고 했다. 그래서 호텔에서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첫 행선지인 옥류아동병원으로) 나갔다.”

평양 목란관 만찬은 언제 시작된 건가?

“목란관에 도착하니 밤 8시가 조금 넘었다. 음식은 최고급으로 준비됐다. 인삼주·평양소주·포도주도 있었는데 몸에 좋을 것 같아 인삼주를 몇 잔 마셨다. 옆에 앉은 어느 북한 분이 자꾸 권했다. 우리 테이블에 술 먹는 분이 안 계셔서 계속 ‘짠’을 했다. 장용석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제 옆자리였는데 인민예술가라고 하더라. 환영한다고 술을 줘 6~7잔은 먹었다. 평양 소주는 도수가 세다. 40도짜리였다. 기본이 25도라고 했다. (북한의 주도는) 잔이 다 비지 않아도 계속 따라주는 첨잔 스타일이었다.”

만찬장 공연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에일리와 알리가 노래를 불렀다. 지코는 랩을 했다. ‘제가 래퍼인데 여러분들이 황당하실 겁니다. 저도 황당합니다’라고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데모 CD를 틀어서 했다. 김형석 작곡가와 알리는 아리랑을 불렀다. 지코가 공연할 때 한국 분들이 워낙 호응을 해줘 나쁘지 않았다. 최현우는 9시쯤 마술을 하느라 가장 늦게 밥을 먹었다. 공연 준비를 하느라 아무것도 못 먹고 10시가 돼서야 허겁지겁 먹었다. 현송월 삼지연 관현악단장과 알리가 (전에 현 단장이 방한했을 때 같이 공연을 해서) 잘 알고 있더라. 이날 현송월이 술에 취했다. 김형석씨가 김정숙 여사에게 노래를 시켰다. 김 여사가 ‘동무생각’이란 가곡을 불렀다. 성악을 해서 그런지 잘 부르시더라. 김 작곡가가 이설주 여사에게도 ‘한 곡 하시죠’ 권했다. 그런데 안 나오더라. 분위기가 싸해질 것 같으니까 현송월이 자기가 일어나서 노래를 불렀다. 탁현민 행정관을 나오라고 해 노사연의 ‘만남’을 같이 불렀다. 그걸 보더니 김정은 위원장이 ‘간나새끼, 술 취해가지고’라고 웃더라. 현 단장과 친한 것 같더라. 그 앞에 있던 최현우는 간나새끼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웃음). 김형석 작곡가가 약간 술을 먹고 기분이 업돼 있었던 같다. 우리도 ‘이설주 여사에게 노래시키면 안 되는데 왜 오버하지’ 그랬다. 그 다음날 김 작곡가도 ‘내가 어제 왜 그랬지?’라고 안절부절 못하더라(웃음).”

한국에선 TV로 실시간 정보를 접했는데 정작 수행단이 모르는 일도 많았겠다.

“알리가 백두산 천지에서 ‘진도아리랑’을 부른 것도 나는 한국에 와서야 알았다. 백두산 정상에서 천지로 내려갈 때 케이블카로 7분이 걸린다. 내가 화장실에 갔다 온 사이 알리 등 일부 멤버가 케이블카를 타려고 줄을 섰다. 나는 그 다음 타임으로 내려갔다. 먼저 내려간 알리와 교차해서 만난 것이다. (남북 정상 앞에서 부른 알리의 즉석 아리랑은) 한국에 와서 뉴스를 보고 알았다. 한번 내려갈 때 케이블카에 20명이 탈 수 있다. 천지 밑은 완전히 낭떠러지다. 걸어가려면 계단이 2000개다. (걸어서) 40분이 걸린다고 한다. (날씨가 조금만 안 좋아도) 내려가서 보는 것이 쉽지 않다. 보게 돼 너무 행운이었다.”

방북 첫날은 숙소에 몇 시에나 들어갔나?

“11시 반에서 12시쯤 들어갔다. 정신 없이 잤다. 일부는 로비에서 대동강맥주를 마셨다. 나도 나중에 마셔봤는데 맛있더라. 백두산에선 들쭉술을 마셨다. 거기는 화학주가 아니라 다 숙성해 만든 술이라 세다.”

“옥류관 평양냉면 밍밍했다”


▎현 감독은 15만 북한 시민이 들어찬 평양 5·1경기장과 백두산 천지 방문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았다. / 사진:현정화
둘째 날 일정은 어떻게 시작됐나?

“10시부터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에 갔다. 연예인들은 피곤하다고 해서 안 갔다. 나와 유홍준 교수, 차범근 감독 등이 갔다. 김정숙 여사를 수행할 사람이 적어서 옆에서 따라다녔다. 예술과 체육 쪽 아이들 대상으로 엘리트를 육성하는 곳이었다. 여기서 배우는 문화, 예술, 체육 유망주가 5000명이라고 했다. 중학생까지 배우고, 그 이상은 대학으로 간다.”

그날 점심을 그 유명한 옥류관에서 먹었는데 맛이 어땠나?

“평양냉면만 먹을 줄 알았는데 코스요리로 나왔다. 냉면이 마지막이었다. 평양냉면을 먹으려고 일부러 덜 먹고 있었는데 요리 양이 제법 많았다. 평양냉면은 면에 식초를 뿌려야 한다고 가르쳐 줬다. 원래 냉면을 좋아하는데 좀 특이했다. 좀 밍밍하다. 면에 식초를 뿌리니 부드러우면서 먹을 만했다. (아이스하키 선수) 박종아는 아무 맛이 안 나니까 양념장을 세 번 달라고 했다. 그래도 밍밍하다고 했다(웃음).”

분위기는 어땠나?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총 네 번 식사를 같이했다. 목란관, 옥류관, 5·1경기장 가기 전 대동강수산물식당에서 철갑상어(현 감독은 동행하지 않고 호텔에서 쉬었다), 그 다음 날 백두산 가서 점심까지. 백두산 줄기가 눈에 들어오는 식당이었다. 평양냉면을 주려고 해서 유 교수가 ‘어제 먹었다. 북한 국수를 달라’고 했는데 한참 있다가 나왔다. 감자국수라고 하던데 그 국수도 참 밍밍했다.”

5·1경기장에 가기 전에 오후 일정은 뭐였나?

“교원대학교, 우리로 치면 교대를 갔다. 구호가 많았다. ‘고상한 근성’ ‘완강한 집중력’이 기억에 남았다. 나도 근성, 집중력이란 단어를 중시하는데 그 앞에 ‘고상한’ ‘완강한’이란 수식어를 쓸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 다음은?

“창작사란 곳을 갔다. 그림을 팔았다. 사신 분들도 있었다. 유홍준 교수도 샀다. 1만 달러짜리도 있다고 하더라. 달러 결제였다. 그 다음이 5·1경기장이었다. 전 세계에서 그런 것을 볼 수 있는 곳은 없다. 카드섹션은 장관이었다. 줄과 열 맞추는 것을 보면 대단했다. 꼬마 애들이 하나도 안 틀리고 하더라.”

아이들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싶다.

“그런 생각도 들긴 했다. 정신력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다 끝나면 조그만 애들이 김 위원장 앞에 서서 깡충깡충 뛰더라.”

그 자리에서 문 대통령이 7분이나 연설했다.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

“우리도 그렇게 오래 할 줄은 몰랐다. 북한 사람들의 기립박수가 그냥 모양만은 아닐 것이란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나갈 때 먼저 나갔고, (15만 관중이) 입장하는 것도 볼 수 없었다. 11시 정도에 행사가 끝났다. 호텔로 돌아오니 11시30분이었다. 백두산행은 5·1경기장에 갈 때 처음 들었다. ‘내일 날씨 좋으면 백두산 갈지도 모릅니다’고 했다. 한편으로 ‘언제 가 보겠나’ 싶기도 했고 ‘새벽에 또 일어나야 되나’ 그런 마음이 반반이었다.”

“이분희가 와 있었습네다.”


▎현 감독이 북한에서 가져온 자료와 적었던 메모를 챙겨 보고 있다. 시간이 흘러도, 기억을 떠올릴수록 당시의 감흥이 되살아난다고 말했다.
백두산까진 어떻게 이동했나?

“특별기 몰고 가신 분이 먼저 가셨다. 날씨도 보고, 비행기 댈 수 있는지 확인하러 답사를 간 것이다. 삼지연공항 활주로가 좁아서 우리 비행기론 못 갔다. 비행기 몇 대로 나눠서 갔다. 아침 7시30분 순안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아침도 못 먹고 탔다. 비행기로 1시간이 걸렸다. 거기서 40㎞를 차 타고 또 갔다. 공항에 내리니 검은색 렉서스 30대 SUV가 와 있었다. 나눠서 탔다. 버스는 못 들어갔다. 유홍준 교수와 포스코 분(최정우 회장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같이 타고 갔다. 1시간 타고 가니 정상 부근이었다. 백두산 정상에 화장실이 있다. 우리나라 옛날 쪼그려 앉는 수세식이었다.”

천지에 갔을 때는 어땠나?

“천지 물에 손 담근 장면을 유 교수님이 사진 찍었다. 날씨가 너무 좋으니까 물에 백두산이 비쳤다. 물이 진짜 맑다. 천지에 날파리가 그렇게 많다. 춥고 높은데 어떻게 날파리가 있지 싶은데, 돌다가 빠져 죽는다. 그러면 천지의 산천어들이 그걸 먹고산다고 한다. 왜 빠져 죽는지 모르겠지만 자연의 순환이 신기했다.”

백두산에 다녀온 뒤 귀국한 건가?

“내려와서 식사하고, 헤어졌다. 호텔에서 짐을 다 싸 갖고 나왔다. 짐을 부친 분들도 계셨는데 난 몰라서 계속 들고 다녔다. 집이 성남인데 돌아올 땐 기다리는 기자가 많아서 경복궁으로 갔다. 한국에 내려서 휴대전화를 받아 보니 정말 많은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방북에서 (과거에 남북탁구단일팀으로 같이 뛴) 이분희는 결국 못 만난 것인가?

“혹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한편에 있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까 정상회담을 하러 가는 것인데 이것이 부각되면 죄송할 것 같았다. 사전에 연락받은 것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랑 같이 다녔던 북한 수행원 한 명이 백두산까지 따라왔다. 점심을 먹고,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갈 상황이었다. 작별 인사를 하러 갔는데 그제야 수행원이 ‘이분희가 와 있었습니다’고 얘기해 주더라. 첫날 스케줄 때 호텔에서 원래 3시에 이동하기로 돼 있었는데 1시40분에 갑자기 나가게 됐었다. 그런데 2시에 이분희가 모처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 스케줄이 갑자기 바뀌어 김정숙 여사의 수행원으로 (옥류아동병원에) 갔던 것이다. 지금 돌아보니 그때 만남이 예정됐던 것 같다.”

뭔가 착오가 생긴 모양이다.

“이분희가 모처에서 기다리다가 내가 안 온다는 연락을 받고 돌아갔다고 했다. 지금 뭐하고 사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대통령을 수행하는 청와대 비서실 분들이 밥 먹을 때마다 날 만나면 ‘이분희 만났느냐’ 물어봤다. 옥류관에서도 5·1체육관에서도. (나 모르게) 미리 언질이 돼 있었던 것 같았다.”

만약 만났다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나?

“나보다 조금 언니다. 무슨 말이 필요했을까. 그냥 만나면 좋을 것 같다. 1993년 만남이 마지막이었다. 만나면 25년 만이다. 서로 은퇴해 그 다음은 얼굴 볼 일이 없었다. 지도자로서 만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했는데 아직 못 만나고 있다.”

“1991년 지바, 살면서 가장 많이 울어”


▎단일팀 코리아는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탁구세계선수권 여자 단체전을 우승했다. 현정화와 이분희는 그 승리의 주역이었다.
과거에 만난 이분희는 어떤 성격이었나?

“처음엔 도도하고 자존심이 셌다. 1991년 지바 세계선수권 남북 단일팀으로 만난 시점에 북한의 인민영웅이었다. 계급이 지도자보다 높았다. 지도자도 함부로 못했다. 라이벌이고 서로 자존심이 있었는데 직접 겪으니 생각보다 여렸다. 원래 간염이 있어서 아팠다. ‘이 친구도 자존심이 세니까 내색을 안 했을 뿐 참 외로웠겠구나’ 싶더라. 그때부터 동질감을 느꼈고. 잘해 주고 싶었다.”

1991년 당시 남북 단일팀은 어마어마한 이슈였다.

“(남북 선수들이) 45일 동안 합숙을 했다. 9시 뉴스에 매일 나왔다. 너무 집중이 안 되니까 15일 만에 (언론을) 차단하고 훈련에 집중했다.”

이분희와 복식조를 이뤄 출전했는데 어땠나?

“사실 우리 약점이 탄로났다. 이분희가 다리가 늦은 편이다. 이분희가 포핸드를 친 뒤 백핸드에 약점이 있었다. 탁구 하는 사람들은 금방 안다. 그러나 (대안은 없었고)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주제로 영화 ‘코리아’가 만들어졌다.

“감독·제작진과 상의했고, 내가 거의 다 관여했다. 영화라서 감동을 주기 위해 각색은 있었지만 전체적 톤은 사실에 입각해 만들어졌다.”

중국은 1973년 사라예보에서 우리에게 패한 이후 8대회 연속 우승했는데 단일팀이 중국을 꺾어 감동이 더 컸던 것 같다.

“(중국을) 이기리라곤 전혀 생각도 못했다.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3연승으로 이길 수 있었는데 단식 2승 후 복식도 세트스코어 1-0으로 이기다 뒤집혔다. 그다음에 내가 덩야핑에게 졌다. 마지막에 북한 유순복이 가오준과 붙었다. 순복이가 ‘지난번에 졌다’고 자신 없어했는데 엄살이었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총 3시간40분이 걸렸다.”

시상대에 한반도기가 올라갔는데 그때 기분이 어땠나?

“그동안 살면서 그때가 제일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올림픽 금메달 땄을 때도 안 그랬는데…. 우승의 기쁨이 아니고 밑에서부터 뜨거운 한(恨)이 올라왔다. 울음이 안 그쳤다.”

단일팀이 구성되기 이전의 탁구 남북 대결은 어땠나?

“총칼만 안 들었지 전쟁이었다. 지고 오면 분위기가 공항 세관에서부터 달랐다. 출입국 관리사무소에서 ‘왜 졌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북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현정화와 이분희, 둘 중 한 명이 쓰러져야 할 상황에서 친해질 수가 없었다. 그런 우리가 뭉쳐서 우승했으니 기적이었다. 이후 남북 단일팀이 또 만들어지고 남북 정상도 만나는 세상이 왔으니 놀랍다.”

아직 방북했을 때의 여운이 안 가신 것 같다.

“이제 한 달 조금 못 됐는데 아직도 ‘정말 다녀온 것이 맞나’하는 생각이 든다.”

- 글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 사진 이원근 객원기자 abcd282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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